
‘project 17717’의 김선문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은 유난히 푸른 하늘이 배경이 되어 준 날이었다. 도봉산 바위가 한 눈에 보이는 탁 트인 공간에서 김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선문 대표가 이끄는 ‘17717’은 지난 10여 년간 성북동을 기반으로 다양한 창작자와 연구자 그리고 기관과 함께 여러 문화 프로젝트를 만들어 왔다.
김대표는 전시, 출판, 아카이브, 브랜딩 등 주제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하여 콘텐츠가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필요한 전문가들과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
먼저 김대표에게 문화기획자란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저에게 문화기획자란 세대와 세대가 만날 수 있도록 이어주고,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잔잔한 활력을 더하는 사람이에요. 사실 처음부터 문화기획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꽤 오래전부터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해왔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 멈춰 있던 낡은 학교 도서관을 다시 정리해 운영했는데 그때 ‘빛깔 있는 책들’ 시리즈라고 한국을 주제로 해서 나온 책들이 있거든요. 경복궁, 단청, 한글 이런 식의 주제를 갖고서 엮은 책이었는데, 그 책이 뭔가 저에게 뭔가 좀 뿌리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 군 복무 중에는 부대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고요. 그 당시는 그게 기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책을 좋아했고,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금 보면 그게 제 시작이었던거죠.”
‘17717’이란 회사 명이 특이했다. 그에게 숫자로 된 이름을 짓게 된 이유를 질문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대학에서 출판디자인을 공부했는데 졸업 후에 열화당 이기웅 대표님을 만나 책박물관을 준비하는 작업에 참여했어요. 그후에 성북동에 자리를 잡고 주민들과 마을잡지를 만들었고, 2014년에는 지하 창고로 쓰이던 곳을 문화공간으로 바꿨죠. 당시 주소가 성북동 177-17번지여서 ‘17717’이라고 이름 붙인 거에요. 생각해보면 제가 해온 일은 지면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지역으로 점차 확장되어 왔어요.”
지면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는 그동안의 프로젝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나를 고른다면 <뿌리깊은나무>입니다. 하나의 프로젝트라기보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 인생 프로젝트에 가까운데요. 20대 중반에 열화당책박물관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뿌리깊은나무>를 봤는데 처음 펼쳐봤을 때 꽤 놀랐어요. 분명 낡고 오래된 잡지인데, 지금 읽어도 여전히 현재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때 언젠가 이 잡지를 또래 청년들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죠. 그리고는 3년에 걸쳐 전국의 헌책방과 중고 거래 사이트를 틈이 날 때마다 찾아다니며 전권 53권을 모았어요. 그걸 ‘17717’을 만들기 전 성북동에서 운영하던 공간에 ‘뿌리깊은 방’을 만들고, 실제로 또래 청년들과 함께 읽기 시작했어요. 잡지가 발행될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가 30여 년이 지나 그 잡지를 함께 읽게 된 거죠.”
김대표가 말하는 <뿌리깊은나무>는 발행인 한창기가 1976년에 창간한 월간지로, 우리 토박이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다루면서 순한글과 가로쓰기, 당시로서는 새로운 편집 디자인을 보여준 잡지이다.
“그렇게 읽다 보니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어요. ‘이 잡지에 나왔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래서 잡지의 ‘그는 이렇게 산다’에 소개됐던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기 시작했죠. 1세대 무대미술가 이병복 선생을 만났고, 같은 결의 또 다른 잡지인 <샘이깊은물>의 표지에 등장했던 천연염색장 안화자 선생을 만나기 위해 전남 구례까지 찾아가기도 했어요. 요즘 성북의 문화기관에서 발행인 한창기와 <뿌리깊은나무>를 다시 조명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오래전 제가 관심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이 지금 다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반가웠어요.”
사물이나 상황을 보는 관점이 남다른 그가 지난 7월 출간한 저서 <생각 안경>에 대해 물었다.
“<생각 안경>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그림책이에요. 수업에서는 매주 하나의 질문을 두고 학생들과 함께 골똘히 살펴봤어요.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어떤 질문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이 나오는 과정이 재미있었죠. 그러면서 이런 경험이 수업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책이라는 형태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고, 또 다른 생각으로 확장되기를 바랬어요. 우리는 보통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무엇을 먼저 보는지, 왜 그것이 눈에 들어왔는지까지는 잘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 안경>은 그런 익숙한 것들 앞에서 잠시 멈춰 질문을 건네는 책이에요.”
이어지는 박경리 문학관을 준비할 당시 이야기에서 ‘연결과 확장’은 그가 일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박경리 문학관을 만들 때도 그랬어요. 제가 디자이너한테 문학관에서 바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앞에서 잠깐 멈추고 저 안을 좀 상상하고 들어가면 좋겠다고 말했죠. 그 상상이 좀 끝나면 들어가자 이렇게요. 그것처럼 학생들한테도 책을 볼 때 먼저 그냥 읽기보다는 제목을 좀 상상해 보라고 하죠. 그렇게 내용을 먼저 상상하고 어느 정도 상상이 끝난 다음에 책을 한번 펼쳐보면 더 읽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말하죠. 그러니까 제가 먼저 상상을 한 다음에 구성을 하고, 그 다음 비교하면서 그림을 만들어 나가거든요. 제가 기획하는 방식은 항상 그래왔어요.”
김대표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함께 신진 작가34인을 만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번 신진 작가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책을 낸 신진 작가 34명을 만났어요. 책을 낸 작가에게 자신의 책이 독자에게 발견될 수 있는 기회이자, 북토크를 통해 직접 독자들과 마주하는 자리이기도 했는데요. 이 일을 맡고 가장 먼저 생각한 건 34명의 작가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게 할 건지였어요. 하나의 행사장에서 같은 형식의 북토크를 반복하기보다 작가와 책을 살펴보고, 각각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연결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서울의 여러 공간을 직접 찾아다녔죠. 공간을 정할 때는 문학을 이해하는 곳인지, 그 공간만의 개성이 있는지, 함께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곳인지, 지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폈어요. 그렇게 북한산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 성북동, 한남동, 남산, 서대문 등 서울의 여러 장소에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게 했어요. 같은 작가와 책이라도 어디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날의 경험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대표는 장소가 주는 의미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오랫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제가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됐는데 사람을 모으고, 관계를 만드는 일이더라고요. 제가 하는 기획은 단순히 많은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접점을 발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고, 실제로 만날 수 있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도 사람과 장소를 먼저 살펴보는 편이고요. 누가 함께하면 좋을지, 서로에게 어떤 접점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만나야 그 관계가 자연스러울지를 봐요. 이 세 가지가 제가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중요하게 보는 기준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쌓이고 그걸 서로에게 나눠주고 그러다 보면 나눠 준 만큼 또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서 커지게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그가 생각하는 문화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저는 문화가 꼭 특별한 곳에 있거나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평범하게 흘러가던 하루에 잠깐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평소라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일 수도 있죠. 전시를 보거나 책을 읽고, 공연을 보는 일도 결국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오랫동안 공간을 운영하면서 그런 장면들을 자주 봤거든요. 전시를 보러 들어온 사람이 작품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처음 만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죠. 평범했던 하루에 새로운 사람이나 생각이 들어오고, 그로 인해 일상이 조금 달라지는 것, 저는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그런 데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마무리에 김대표는 어느 날 전시 방명록에서 ‘동네 주민입니다. 늘 전시 잘 보고 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라고 적힌 글을 보는 아주 작은 순간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몇 명이 왔는지, 얼마나 큰 성과를 냈는지 같은 숫자보다 시간이 지나면 한 사람의 말이나 표정이 더 오래 남는다는 김대표의 말에서 문화가 지닌 본질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삶에서 중요한 가치는 ‘같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대표에게서 큰 사람의 풍모가 엿보인다. 어쩐지 작은 거인이 품은 큰 꿈이 펼쳐질 세상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