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 남몰래 수선화 한 송이를 두고 갔다.
그것도 종이로 접어 만든 ‘종이꽃’
이 설정 만으로도 아련해지는 히구치 이치요의 단편 소설 ‘키재기’
단 14개월 동안 써 낸 소설로 일본 근대문학의 명작을 남긴 일본 최초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작 <키재기(たけくらべ)>는 도쿄의 유곽 지대인 요시와라 근처 마을을 배경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소녀와 소년의 애틋한 감정과 안타까운 현실을 다룬 단편소설이다.
요시와라 최고 기생인 언니를 둔 미도리와 스님의 아들 신뇨.
마을 축제날 밤, 초키치 패거리가 미도리와 쇼타 무리를 습격하고, 초키치는 신뇨를 끌어들여 미도리를 모욕한다.
이때 신뇨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되고, 미도리는 평소 호감을 품고 있던 신뇨가 자신에게 냉담하게 대한 것에 깊은 상처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어느 비 오는 날, 신뇨는 심부름을 가다가 미도리의 집 근처에서 나막신 끈이 끊어지게 된다.
이 모습을 본 미도리는 선뜻 돕고 싶지만, 축제날의 앙금과 쑥스러움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고 만다.
신뇨는 미도리가 떨어뜨려 준 천 조각으로 끈을 묶고 서둘러 자리를 뜨고,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어색함과 안타까움만 남게 된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미도리가 기생이 되는 운명을 받아들인 어느 서리가 내린 아침, 미도리는 집 문 간에 누군가 두고 간 종이로 접은 수선화 한 송이를 발견한다.
종이꽃은 신뇨가 스님이 되기 위해 불교 학교로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안타까운 작별 인사였다.
이 소설은 아이들이 키를 재며 자라는 것처럼 성장하지만, 봉건적 사회 구조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우정이 꺾이고 어른의 세계로 편입되는 서글픈 과정을 시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낸 명작이다.
일본 5000엔 지폐 인물일 정도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는 하급 관리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사망으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이치요는 전통 시가인 와카를 배우며 고전 문학적 소양을 쌓았고, 극심한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 생계형 소설 쓰기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1894년 12월부터 결핵으로 사망하기 전인 1896년 초까지 약 1년 2개월 동안, 오늘날 일본 근대 문학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주요 단편들을 잇달아 쏟아낸다.
하지만 문단의 거장 모리 오가이, 고다 로한 등으로부터 ‘진정한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명성의 정점에 올랐으나, 폐결핵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 소설 ‘키재기’는 예비 유녀 미도리가 요시와라의 구성원이 되어 가는 과정을 토대로 자본주의의 파도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근대의 소외자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담아내며 에도와 메이지를 잇는 다리를 놓았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이치요의 소설은 실제로 중류 계급에서 빈곤층으로 하락하며 파혼을 당하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며 힘든 노동을 경험한 이치요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리듬감 있는 문체를 사용하면서도,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사회적 모순을 포착하는 시각은 지극히 근대적인 시대를 앞서간 소설가였다.
소설 <키재기>에서 그래도 남겨둔 수선화 한 송이가 짧은 생애를 남긴 이치요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