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의 책 읽기 좋은 밤] 영혼의 스며듦

사랑에 빠진 여인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을유문화사

책을 읽고 글을 쓴 지는 꽤 되었지만, 외부 활동을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활동을 하다 보니 명함이 필요했다. 명함에 많은 정보가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밋밋한 건 또 싫어서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오래전에 독서 모임을 하던 중에 독후 활동으로 만났던 명화가 떠올랐다. 고상한 여인이 장미꽃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는 장면이었는데 작품의 이름도 화가도 기억나지 않고, ‘우아하다’라는 명화의 느낌만 떠오를 뿐이었다. 검색 창에 여러 검색어로 끈질기게 검색하다가 마침내 찾았다. 영국의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장미의 영혼>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사랑을 주제로 쓴 테니슨의 시 「모드」 속 “장미의 영혼이 내 핏속으로 들어왔다”라는 구절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오뚝한 콧날과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붉은색 뺨의 여인이 장미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고 있다. 꽃과 여인의 영혼이 만나는 느낌이었다. 여인의 시선을 가로막는 높은 담장과 좁은 공간은 그녀의 억압된 현실이 아닐까 싶었고, 결국 행복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여인의 절망감이 느껴졌다.

만약 나라면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는 여인’ 정도의 평범한 제목을 붙였을 것 같은데, <장미의 영혼>이라는 제목은 몹시 낭만적이다. 꽃의 영혼이 향기로 변해 냄새 맡는 행위를 통해 여인에게 흘러 들어가고, 여인이 곧 꽃이 되기를 바랐을까. 문득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런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게 없는 다양한 삶의 모습, 향기, 시간이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나에게 들어와 어느새 내 것이 되는 것. 간접경험이라는 식상한 말보다는 영혼의 스며듦이라고 말하고 싶은 행위.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장미의 영혼>을 명함 앞장에 인쇄하고 뒤에는 북 칼럼니스트 윤정, 이라고 이름을 찍었다. 명함을 받는 사람들의 첫 마디가 ‘어? 명함이 너무 예뻐요!’였다. ‘책갈피로 쓰세요’라고 하면 다들 좋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을 쓰는 작가 친구가 “네가 옛날에 독서 모임에서 고른 그림 있잖아. 그 그림이 책 표지에 있더라? 그래서 사 왔지.”라며 책을 선물했다. <장미의 영혼>이 표지 그림이 된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유명한 작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이 책은 제인 오스틴의 문학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문학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작품들 중 하나이다.

『사랑에 빠진 여인들』은 얼핏 어슐라와 구드룬 두 자매와 주변 인물들이 겪는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만 작품 전반에 흐르는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격변하는 연애관과 결혼관, 그리고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 이르기까지 당시로서는 꽤 신선하고 자극적인 작품이다.

‘사랑’이라는 화두는 실체가 없는 관념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때로 권력이나 상징에 의해 변질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구절을 보면 ‘사랑’이라는 말에는 변화하면서도 불변하는 어떤 진리 같은 것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는 사랑이란 개인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개인이 사랑 혹은 그 어떤 관계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빛나는 단독의 영혼이 그 자신의 존재 조건들 가운데 하나인, 그 자신의 평형 상태의 조건으로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랑이 전부라고 믿었다.” P.421

성공, 직업, 학위, 타인의 인정, 우리가 삶에서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은 지나고 보면 모두 변하는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끝내 붙들어야 하는 불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어야 할 단 하나의 불변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장미의 영혼이 내게 들어와 내가 장미가 될 때, 책의 영혼이 눈으로 들어와 내가 책이 될 때, 내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평범한 내가 책과 글로 비범해지지는 않겠지만,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영혼의 빛은 흐려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빛나는 단독의 영혼이 되고 싶다. (글, 사진 김윤정 북칼럼리스트)

김윤정 북칼럼리스트 / 현재 ‘RTK뉴스’, ‘ㅍㅍㅅㅅ’ ‘광주in’ 에서 서평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서평가 모임인 ‘서평클럽 러블리비블리’의 운영자 및 ‘출판연구학교’의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스포츠경향’과 ‘문화스포츠뉴스’에서도 서평 칼럼을 연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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